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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의무경찰, 2008~2010

봄이 오긴 왔구나.

봄이 오긴 왔나보다. 날씨가 많이 풀렸다. 아직 벚꽃이 휘날리진 않지만, 느낌만은 곧 여기저기에서 흐드러지게 필 것 같다.

애증의 용산. 용산참사와 그 후폭풍이 내게 용산을 악몽의 도시로 만들었다. 막상, 다 정리되니 다시 제 모습을 찾은듯 하다. 이촌역 근처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 근무하다가 쉴 때, 가끔 가서 놀러온 가족들과 커플들을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아직도 생각난다. 입대 전에, 누군가랑 똑같은 곳에 놀러가서 눈에 띄는 주변의 전의경을 보며, '여기에도 전의경이 근무하나?'란 궁금증을 가졌었다. 이제는 안다. 근처에서 미8군 시설경비 근무중에 공원에 쉬러 온 대원들이란 것을.

내가 바라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내가 된다는 경험은 참 이상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2008년 8월, 방패를 앞에 두고 경복궁 동문 앞에서 로보트 마냥 멍하니 정면을 뚫고 있던 내게 누군가가 "혹시..어!"하면서 말을 걸었다. 2006년, 1학년 때 같은 수업을 들으며 친해졌던, 나이가 좀 많은 동기였다. "너 군대갔다더니 여기 있구나. 고생 많네."라고 말을 건네는 그가 참 부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왜 하필 이런 바보같은 모습일 때 마주치는 걸까. 그 후로도 많은 지인들을 거리 곳곳에서 우연히 만났다. 의경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당연히 장점이 아닐까 싶다.

1년은 또 눈깜짝할새 흘렀다. 작년 이 맘때는 지금 이 순간이 올까 싶었는데, 이제는 위에 고참이 없다. 모두가 집에 갔다. 언제 집에 가냐고 놀리던 고참들이 아무도 없다. 좀 섭섭하다. 장난 반, 갈굼 반으로 놀리고 괴롭히던 고참들이 없으니 심심하기도 하다.

늘 꿈꿔왔던 중대왕고가 됐지만, 별로 좋은 것도 없다. 그저 집에 가고싶다.
그래도 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개인의 자기개발보다는 부대를 위해 힘쓰고 있다. 내게 맡겨진 임무가 있는만큼, 이 직분을 후임에게 인수인계하는 그 날까지 난 우리 중대원들과 중대의 명예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막상 전역의 그 날이 오면, 남는 것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 흔한 자격증도 고작해야 쉬운 ITQ 하나. 내게 지금 남은 것은 몇날몇일을 떠들어도 끝나지 않을 2년 군생활의 독특하고 잊지못할 추억들과 좋은 사람들 뿐이다. 난 여기에서 이거라도 얻었으면 됐다며 또 자위하고 있다.

오늘은 아침일찍부터 용산 미8군 시설경비를 나갔다가 왔다. 올림픽대로, 등받이를 편히 뒤로 제낀 버스 뒷좌석, 활짝 연 창문 사이로 내 허파를 구멍낼듯이 세차게 밀고들어오는 시원한 강바람, 그리고 강건너 강북의 풍경. 죽을 때 까지 잊지못할 내 군생활의 소중한 한 장면이다. 오늘 반포대교를 건너면서 들은 Red Hot Chili Peppers의 Otherside가 또 내 머릿속에 노래하나와 풍경하나를 짝짓기해주었다.

Red Hot Chili Peppers - Otherside


옆에서 '시간 더럽게 안간다'며 툴툴거리는 동기. 그리고 그가 찍어준 사진 한장. 봄날의 전쟁기념관에서 난 또 영원히 지우지 못할, 지우지 않을 추억 하나를 억지로라도 사진에 박아 넣는다. 내가 이렇게 보낸 오늘은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깐. 남는 것은 오직 기억뿐이니깐. 그리고 그 기억의 재생을 도와주는 사진뿐이니깐.

성큼성큼 다가오는 전역의 그 날을 고대하며ㅡ

100306, @용산 전쟁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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