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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4

영광스러운 전역, 그리고 새로운 출발! 아침 8시, 단잠에서 깨어나 잘 먹지도 않던 아침짬밥을 먹으러 취사반으로 내려갔다. 평소와는 다르게 꿀맛이었다. '마지막 짬밥 맛있게 드십쇼!'라고 웃으며 말을 거는 취사반 후임이 고마워서 식판을 깨끗이 비웠다. 단화를 질질 끌며 내무실로 다시 올라가서 이제 더이상은 입을 일이 없을 경찰근무복을 마지막으로 차려입었다. 여섯명의 부대동기가 함께 모여 경비계로 향했다. 제대휴가 나오는 날까지 두발상태가 불량하다며 휴가증을 안주고 애먹였던 전경관리반장님도 오늘은 말없이 수고했다며 전역증과 자그마한 전역 선물을 하나씩 손에 쥐어주셨다. 그렇게 싫어했던 경비과장님께서도 밖에 가서도 하는 일 모두 다 잘 되고 건강하길 빈다며 한 명씩 악수로 전역을 축하, 격려해주셨다. 아, 난 왜 눈물이 이리 많은걸까. 밖으로 흘.. 2010. 5. 12.
"그때 당신이 경찰청장이었다면?… 화염병에 선량한 시민이 죽었다면?…" ※ 조선일보 기사링크 : [최보식이 만난 사람] '용산 참사' 때 물러난 김석기 前 경찰청장 내정자 조선일보에 김석기 前 서울청장님의 인터뷰 기사가 떴다. 읽어보며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안타까움과 해결되지 않는 의문점, 그 외의 복잡한 감정들이 다시금 수면위로 떠올랐다. 김석기 前 청장님은 내가 근무중인 경찰서의 서장을 지내기도 하셨다. 물론 내가 군복무하기 10년전인 98년에 취임하셨으니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부대 지휘관분들께 훗날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가 가끔 볼 수 있는 정겨운 '포돌이, 포순이'도 이 분이 창안하셨다. 게다가 군복무까지 전투경찰로 자원하셔서 마친, 뼛속부터 경찰이신 분이다. 김 前청장님은 지난 2009년 2월 10일, 용산참사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결국 前 경찰청장 내.. 2010. 3. 23.
용산참사해결이 서울의 전의경에게 갖는 의미. 아...방금전이었다. 아직 해결안된 몸살로 죽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자고 있던 나를 고참이 깨웠다. "야, 대박이야! 용산참사가 사실상 해결됐대!" "에이.....구라...뜬금없이 그게 왜 해결됩니까.." 그렇게 컴퓨터에 앉아 기사를 검색한 순간, 우와. 이거 진짜다. 그 '용산참사'가, 나의 군생활을 가득 채웠던 그 사건이 드디어 끝이 보인다. 용산참사가 터졌을 때 난 일경이었는데, 지금은 조금씩 끝이 보이는 수경이 되어있다. 시간은 참 잘도 간다. 아직도 신기하다. 뭐, 요즘은 소위 '특별방범기간'이라서 내가 소속된 중대와 같은 방범순찰대는 특별한 큰 집회 등이 없는 이상 각 경찰서 관내 방범근무와 교통근무 등 생활치안쪽에 전력투입되고 있어서 용산에 안간지 꽤 됐지만 그 전까지는 내집처럼 오가던게 용산.. 2009. 12. 30.
명동성당, 용산참사,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 ※ 사진 클릭하시면 좀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2009년 10월 29일) 명동대성당에는 많은 전의경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천주교 신자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세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약 700여명의 서울청, 기동본부, 경찰서 소속 전의경이 새신자로서, 그들의 첫걸음을 축복해주는 대부(代父, godfather)로서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아침부터 줄줄이 모여들었다. 우리 중대에서는 애석하게도 새신자가 한명이었다. 그리고 대부를 서는 나와 함께 이 곳까지 인도해주신 담당 선교사님까지 총 3명만이 참석. 다른 중대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기동대 같은 경우에는 중대당 수십명이 우르르 와있었다. 신자 입장에서는 참 부럽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소수만 참석한 우리 중대가 좀 부끄.. 2009. 10.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