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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회사원, 2014~

광복절, 그리고 (나의) 독립선언문

by hyperblue 2020. 8. 15.

언젠가부터 갈구했던 독립을 드디어 쟁취했다. 서른넷이 되어서야 독립 '쟁취'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사실 많이 부끄럽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한달 전 즈음 회사 후배 민수와의 충동적인 복덕방 투어로 시작했던 독립 추진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의 이전 자취 경험은 정확히 10년 전인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년간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패기 넘치게 전역한 후, 회계사 시험준비를 하겠답시고 학교 앞인 신촌역 근처에 자취방을 잡았다. 모든 것은 부모님의 따사로운 경제적 은총 속에서 등골브레이커 모드로 진행되었고, 시험을 접고 현재의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는 2014년까지 약 4년 동안 20대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본가로 돌아갔다.

나와 아버지의 통근을 고려하여 일부러 1호선 라인으로 이사까지 감행하신 부모님이셨기에 그 마음에 감사하며 만 6년을 꽉 채운 기간 동안 잘 얹혀 살았지만, 1~2달 전 부터 독립에 대한 욕구가 가슴 속 깊은 심연에서부터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퇴근 후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머니/아버지가 너무 좋고, 티격태격하는 동생을 보는 것도 좋은데 왠지 모르게 독립을 하고 싶었다. 이렇다 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연애도/썸도 딱히 방문을 닫을 부끄러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친구들과 이따금씩 통화하더라도 스피커폰으로 편하게 전화하는 프라이버시를 갖고 싶었고, 원하는 음악을 방문을 닫지 않고 크게 틀고 싶었고, 내가 원하는 공간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었다. 위의 것들은 내가 들이지 않아도 될 큰 돈을 들여서 맞교환해야 할 가치/목표라고는 보기는 어려웠다. 소위 '가성비'가 매우 안좋았다. 하지만 남들이 모두 결혼적령기라고 말하는 지금, 결혼이 전혀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았고, 회사/집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에 체감할만한 큰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게 내가 밥주걱으로 말라비틀어진 솥을 벅벅 긁듯이 긁어낸 비루한 명분이었다.

이 사건에는 트리거가 존재했다. 철두철미한 준비 하에 이루어진 계획적인 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무실에서 늘 쿨내가 풀풀 풍기는 옆자리 후배 민수는 기존 전셋집의 만기가 다가온다며, 새로운 거처를 찾아야 하는데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언젠가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물론, 민수는 미끼라고 생각하고 내게 던진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혼자 집 보러 다니면 심심할텐데 바보 선배 한 명이 동행하면 외롭지 않을테니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동안 민수와 같이 집을 보러 다니며 시장의 분위기와 매물 종류별 호가상황을 가볍게 파악한 후, 나만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했다. 직접 해보니 '네이버 부동산'은 믿을 것이 못됐다. 부동산에 연락해서 각 매물들의 입지와 방 구조를 보러 다니면서 실망감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실내 쓰레기장 같이 배달음식 상자가 발디딜 틈 없이 쌓여있는 5평 남짓한 방 전세가 1억 2천, 뭐 그런 식이었다. 거의 3주 정도 평일 저녁과 주말을 불문하고 매물을 보러 다녔지만 내가 원하는 방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냥 이렇게 현실의 벽 앞에서 독립투쟁은 찻잔 속의 태풍 마냥 지나갈 것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동산 직거래 카페에서 발견한 글 하나- 나의 마음 속 고향인 신촌 부근의 원룸이었다. 신촌역에서 거리가 조금 있긴 했지만, 10년 전에도 산책 삼아 걸어다니다가 지나치던 동네였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연락해서 방문 날짜를 잡았다. 퇴근 후 가서 본 그 방은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분명히 꽤 낡은 집이었지만, 그간 지나쳤던 여느 풀옵션 오피스텔/원룸들과 다르게 10평 정도의 큰 평수에 부엌/거실과는 분리된 넓은 방, 그리고 조용한 동네라는 3박자가 들어맞는 곳이었다. 그리고 집이 마음에 들어서 세입자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대학교 후배- '이건 운명'이라고 최면을 걸었고, 난 그 때 봤던 그 방에서 지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좀 서글펐던 점은 부모님의 저항(?)이 예상 외로 너무 약했다는 것이다. 하라는 결혼은 안하고 독립을 하겠다며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도를 걷지 않는 늙은 아들에게 '대체 왜?'라는 반문과 한숨만 돌아왔다. 이렇게 사실상 프리패스일 정도로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싶었다. 밥도 잘 안해먹는 내게 반찬을 싸주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감사하면서도 죄송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향에 민감하고, 거주환경에 민감한지라 어렵사리 홀로 이삿짐을 다 옮긴 후 1주일 동안 청소와 정리만 했다. 아무리 청소를 해도 빠지지 않는 전 세입자(후배님..미안)의 그 정체불명 홀아비 냄새를 빼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쉽게 빠지지 않았다. 퇴근 후 정리가 미처 끝나지 않은 집에 들어설 때 마다 느껴지는 이질감과 냄새는 날 집 밖으로 내모는 것 같았다. 마치 이 공간의 면역세포가 낯선 나를 침입자로 간주하여 공격하는듯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이사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 2020년 8월 15일 새벽 2시 30분- 난 이 공간을 그 누구의 물리적 도움도 받지 않고 나만의 힘으로 완전히 접수했다. 엄청난 땀과 무력감이 뒤섞였던 일주일이 지나가고, 난 이 곳의 테라포밍(terraforming)이 완료되었음을 선언한다. 정말 이제야 내 집 같다. 그리고 20년이 된 낡은 방 구석구석에 나의 튜닝이 한껏 더해졌다. 심지어 핸드폰으로 집 밖 어디에서든 방 불을 켜고 끌 수 있고, 에어컨/세탁기를 조작할 수 있도록 세팅까지 했다. 비록 전세이긴 하지만, 사는 동안 불편함 없이 살고 싶었기에 (쓸데없는) 지출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일지는 몰라도 미래의 나 다음 세입자는 계 탔다.

이 책상은 향후 모든 것의 시작점이 될 것

육체노동/쇼핑노동을 멈추고 이 독립된 공간의 바이브를 음미하며, 서른넷 중반의 내 인생 전환점을 기쁘게 마주한다. 발달과업을 빠르게 달성한 주위 친구들은 결혼을 하고/아이를 낳고/서울 시내의 아파트를 사고, 저마다의 인생 트랙을 달리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건네들으며 나름의 스트레스를 받고 계신 어머니께는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불효자는 웁니다. 하지만, 난 아직 나만의 행복을,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 속에 있다. 아직은 하고 싶은 것/경험하고 싶은 것이  많다.

'독립선언문'이라는 거창한 제목에 걸맞게 넘버링을 하며 구체적인 각오를 쓰려고 하였으나 세상 일이 그렇듯 글쓰기도 마음처럼 쉬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딱 하나- 한 문장이 생각난다.

깨어있고 싶다.

직장/집을 멍때리고 오가는 회사의, 우리 사회의 조그마한 '톱니바퀴(1)'로 살고 싶지는 않다. 설령 그렇게 산다고 하더라도 '생각하는 톱니바퀴'가 되고 싶다. 귓속에 꽂히는 멜로디와 비트 속에서 감정을 느끼고,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소통 속에서 의미를 느끼고, 책의 구절 속에서 저자의 속삭임을 캐치하고 싶다.

경제적으로 독립했기에 10년 전과는 판이한 양상의 독립. 공교롭게도 10년전 그 동네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회계사 수험생활 때 종종 미사에 참석했던 성당이 30초 거리에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혹자는 늘 학교 근처를 맴도는 나에게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으면서 아직도 대학생인줄 안다'고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몸은 늙고 있지만, 마음만은 학교 근처에서 노닐던 그 시절에서 멈춘 것이 사실인 것 같아서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난 그 때 처럼 파란 하늘에 떠 가는 흰 구름을 보면서 사유하고, 미래를 고민하고, 새로운 인생의 경험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나는 깨어있고 싶다.

나는 정말이지 깨어있고 싶다.

이게 내 독립의 포부이며, 선언이다.
2020년 8월 15일 새벽, 이 곳이 새로운 베이스캠프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흔적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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