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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회사원, 2014~

2021년 인생의 쉼표, 근황/생각 정리

by hyperblue 2021. 4. 22.

요 며칠 드라마틱한 일이 많이 있었다. 거의 매일 올리는 금융시장 시황 글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오랜만에 남기고 싶어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찌됐든 이 블로그는 2006년부터 이어져 온 내 인생의 기록이고 종합장이다.

#1.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를 회사에 입사하던 해인 2014년에 떠나보내고, 2021년 4월 11일 남아계시던 할머니 마저 눈을 감으셨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날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고마운 축하 인사를 받던 와중에 갑자기 집에서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니 스탠바이하라"란 연락을 받았다. 갑자기 멍 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는 89세라는 연세에 노환으로 영원히 떠나셨다. 할머니께서 공식적으로 세상을 떠나신 일시는 4월 11일 오후 4시 11분이었다. 꿈보다 해몽이지만 내 생일을 뜻하는 숫자인 "4.11"이 두번이나 들어가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생전의 할머님은 나를 끔찍이 아끼셨다. 가까이 살지 않아서 명절때나 내려가서 인사를 드리곤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많은 사랑을 주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던가. 할머니께서 나를 사랑하고 아끼셨던만큼 내가 할머니를 사랑하진 않은 것 같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어머니이시면서도 가끔 엄마를 힘들게 하는 시어머니셨다. 내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좀 양가적인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할머니께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가끔은 할머니가 미웠다. 내겐 한없이 관대하시고, 애정을 보여주셨지만 말이다. 하지만, 전화 목소리 한번 듣지 못한 채 할머니는 갑작스럽게 영영 떠나셨다. 내겐 '황망하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세상에 남아계시던 부모님을 이로써 모두 떠나보낸 아버지의 슬픔에 감히 비할 수 있을까 싶지만. 자동차 액셀을 마구 밟으며 급하게 내려가서 많이 울었다. 망자의 빈 자리를 느끼며, 입관을 바라보며, 발인을 옆에서 함께 하며, 아버지의 슬픔을 옆에서 느끼며-

내 나이가 30대 중반인지라 이런저런 경조사가 주변에 많다. 보통 결혼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장례 또한 적지 않았다. 처음 부모님을 대동하지 않고 내가 상갓집을 다니기 시작했던게 대학생이었던 20대 중반인 것 같다. 사실 결혼식 참석은 그 무게감이 조금은 무뎌졌다. '프로 참석러' 반열에 들 정도는 아니지만,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결혼식에는 대부분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간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의 근황도 업데이트 하고 두 사람의 인생 제2막을 축복해주는 의미있는 자리 아닌가. 하지만, 상갓집은 어딜 가든 늘 마음이 무겁고 뒷맛이 개운치 않다. 망자를 떠나보내고 남은 이의 슬픔을 목도하기 때문인걸까- '죽음'이란 명제는 언제 생각해도 가슴 한 구석이 무겁고도 무겁다. 당연히 그렇듯 망자와 나와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정도도 강해진다.

할머니를 눈물로 떠나보내고 텅빈 할머니 댁에 가서 유품 정리를 도왔다. 여기저기에 나의 어릴 적 사진, 아버지와 삼촌/고모들의 어릴적 사진들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이 집안에 시집오시면서 물려받은 것들도 있었다. 낯선 집안으로 처음 시집왔던 할머니의 당시 심정은 어떠셨을까. 자식을 낳고, 손주를 보고 수 많은 해와 달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셨을까.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망자를 추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내색은 많이 안하셨지만 어머니를 여읜 아버지의 가슴 속 헛헛함, 지근거리에서 그 공허함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어머니인 할머니를 사랑하셨다. 나 역시 그런 아버지의 결을 물려받아서일까. 절대적인 강도를 누군가와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아버지/어머니에 대한 마음 자체는 참 큰 것 같다. 이게 실질적인 효도와 연결되지 않는 것은 문제일 수도 있겠다만.

할머니의 생전 모습이 눈에 아직은 아른거린다. 정말 강아지를 맞아주듯이 나를 반겨주시던 당신의 그 목소리와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온기는 영원히 나의 마음 속에 기억될 것이다. 가끔씩 '엄마를 힘들게 한다'는 생각에 적개심을 키우곤 했던 나의 그 옹졸한 마음에 대해서 이제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할머니는 미우나 고우나 나의 아버지를 세상에 있게 하신 어머니이셨고, 나를 조건없이 사랑해주시던 분이셨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셨으니 부디 거동이 불편하셨던 인생의 말년을 보상받듯 세상 구경 실컷하시고 행복을 만끽하셨으면 좋겠다.

생전에 그토록 바라셨던 손주며느리를 끝내 보여드리지 못하고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할머니, 사랑해요. 그 곳에서는 더욱더 행복하세요.

못난 손자 올림.

#2. 연봉이 올랐다.

눈물을 쏟다가 갑자기 세속적인 얘기를 끄적거리자니 나조차도 민망하지만, 이 역시 기분 좋은/훗날 기억하고 싶은 일이기에 적어본다. 코로나19로 벌써 2년째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요즘이지만, 감사하게도 팬더믹의 영향을 비켜가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서인지 고용불안 같은 것은 느끼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새로운 연봉이 책정되었는데, 세전 기준으로 앞자리가 바뀌었고, 세후 월급 기준으로도 앞자리가 바뀌었다. 훨씬 큰 돈을 받는 이들에겐 보잘 것 없는 액수일지라도 내겐 여러모로 의미있는 숫자였다. 입사해서 책정되었던 첫 연봉숫자도 정확히 기억하기에 벌써 근속 만 7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잠시나마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고, 그 숫자가 주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많은 이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으나 그러진 못했다. 그냥 이 숫자가 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이 숫자와 맞교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올해 초에 조직이 개편되고, 업무가 바뀐 이후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정말, 돌이켜봐도 휴일을 포함해서 단 하루도 없었다. 항상 금융시장을 모니터링 해야했고, 특이사항이나 이벤트가 있으면 주시해야 했고, 나라는 사람을 쿡 찔렀을 때 전문가처럼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고, 틀릴지라도 전망을 풀어놓을 수 있을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물론, 난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고, 어디가서 구박받지 않을 정도 수준은 된다는 알량한 자부심 같은 것도 조금 생겼다. 그래도 지금은 이 공간에 다 풀어놓을 수 없는 여러 압박감에 소위 '즐기면서' 일을 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연봉 숫자가 조금 바뀌었다고 내 삶의 변화는 전혀 없다. 이 숫자의 변화가 갑자기 집을 살 정도의 부를 만들어주지도 않고, 현재의 처지를 어떻게 바꾸지도 못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회사에 이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란 고민을 하게 해주고, '이런 가치를 부여해주는 회사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숫자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숫자는 그에 응당한 책임감과 능력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회계전표만 보며 틀린 숫자/글자를 찾던 시절에서 7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가끔 고민이란 것이 필요하고, 대학교 때 배우거나 듣거나 경험했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활용해야 하는 업무의 담당자가 되었다. 나는 그저 큰 조직의 부품일뿐이지만, 나라는 부품이 한 순간 빠졌을 때 여러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울 것이란 생각을 하게되고, '아, 내가 생각보다 많이 컸구나.'란 알량한 결론 마저 도출하게 된다.

7년이란 세월을 함께 한 회사는 내게 단순히 생계를 꾸려가게 해주는 플랫폼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 되었다. '왜 여기에서 나랑 같이 있는걸까?'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똑똑하고 인간미 있는 동년배들과의 협업이 가능한 공간, 그리고 종종 심도 있는 인생담론도 격의없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 지금의 회사가 좋은 이유는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결국 '사람'이다. 회사를 박차고 나가기 힘든 이유는 이 사람들과의 이별이 자신없기 때문인듯 싶다. 내가 생계를 꾸려갈 수 있게 해줌에도 감사하지만, 이토록 좋은 사람들을 채용해서 함께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해 회사에 가장 고맙다.

이 뿌듯한 기분을 회사 밖 누군가와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은 훗날 아쉬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3. 질풍노도의 시기

주위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도 잘 하고, 몇몇은 2세도 키우고, 저마다 인생의 궤적을 그려가는데,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란 생각이 요즘들어 많이 든다. 천정부지 오르는 서울의 집값을 바라만보며 위에서 기뻐했던 '인상된 연봉'을 십수년 모아도 살 수도(buy) 없고 살 수도(live) 없는 이 현실 앞에 조금은 무기력해진 것 같다.

수 많은 이력서를 쓰다가 원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젊은 친구의 기사를 보고 가슴 한 구석이 아팠다. 최소한 나는 이렇게 삶을 비관한 친구보다는 넉넉한 삶을 살고, 누리고 있는데. 그래도 워낙 잘난 사람들이 많은 서울바닥인지라 나이를 먹을수록 위축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나보다.

대학생이란 타이틀로 세상을 살아가던 20대는 그런 의미에서 참 행복했다.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 종종 받는 귀빈 대접이 싫지 않았으며, 그 타이틀이 주는 특권을 참 많이도 누렸던 것 같다.  졸업장은 어딘가에 잠자고 있고 매일 출퇴근이 반복되는 회사원이 된 지금-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겠다며 아둥바둥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꼭 어딘가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동산만 깔고 앉아있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게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그걸 부정한 처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게 자본주의의 조금은 어두운 일면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교다닐 때 친구들과 백양관 앞 풀밭에 누워서, 혹은 상경대 본관 앞 뜰에 앉아서 하늘을 보며 진지한 인생고민을 나누던 때가 많았다. 그 때도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락밴드가 내 본업인양 학교를 다니며 '이게 젊음 아니겠어'라며 헤드뱅잉을 하다가도 '졸업하면 어떻게 살아야하지?'란 고민을 하던 그 때. 돌이켜보면 '어떻게 먹고살지?'의 방점은 취업을 못할까봐 걱정한다기보다는 '취업은 당연히 하는데 어떤 일을 해야하지? 나의 직업은 무엇이어야하지?'에 있었다. 이 또한 당시 우리들의 근거없는 자신감이었다. 지금의 동문 후배들 몇몇에겐 사치로 받아들여질수도 있는 그런 고민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졸업한지 7년이 된 지금- '난 과연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란 생각이 부쩍 자주 든다. 친한 동기들 모임원 중에 결혼이 아직 예정에 없는 사람은 이제 나 밖에 없다. 스무살 때 부터 동고동락했던 이들 중에 내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곤 솔직히 생각해본적 없다. 부끄럽지만 '나는 누군가가 내게 여생을 함께 하자고 약속할만큼 매력있는 사람은 아닌가보다'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누구나 싸이월드를 하던 그 시절, 내가 말년에 기율경으로서 온 부대를 휘젓고 다니던 위풍당당 의경시절 사진에 대학동기가 "인생의 커리어 하이를 군대에서 찍고 이제는 내려올 일만 남았네"라며 재미있는 댓글을 남긴 적 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그의 장난스러운 댓글이 어찌보면 현실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폐 끼치지 않고 착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뒤처진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물리적으로 혼자있음에서 비롯된 외로움은 사실 견딜만하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씩 낮아지는 자존감은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버버 하다보니 남들따라 대기업에 입사했고, 어쩌다보니 나름 조직에서 비중있는 일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의사결정 혹은 의견개진이 회사에 영향을 미치는 포지션을 맡았고, 적당한 월급도 받고 있고- 이런 식으로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나열해보니 지금의 난 '회사원'이라는 타이틀을 빼면 아무것도 없는 빈껍데기 같은 사람인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기타, 음악, 자유분방한 사고- 회사에 다니기 전의 나는 이런 단어들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런 단어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이런 가치가 투영되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너무나 줄어들었다. 그와중에 인생의 통과의례가 자꾸 늦어지는 것 같아서 이따금씩 느끼는 조바심. 그 조바심은 낮은 자존감으로 귀결되며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자주 되묻게 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다시금 날 몰아넣고 있다.

나의 반려자가 될 누군가에겐 매력있고, 유쾌한 사람이겠거니, 그렇겠거니. 나의 이런 고민을 사석에서 가끔 공유하는 친구들은 내가 아직도 젊게 산다며 부럽다고 하기도 한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내 속을 긁는걸까, 모르겠다.

학창시절에 풀던 수학문제엔 틀리더라도 답이 있었는데, 작금의 내 인생항로는 틀린지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당신의 인생에 대해 서술하시오'라는 대학교 스타일 주관식 시험지를 받아들고 어떻게든 부분점수라도 받기 위해 의미없는 글자들로 종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인생은 방향성이지" 라고 주변에 늘상 말하고 다녔는데, 정작 난 그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있는걸까.

어렸을 때는 '아 됐고, 난 다 필요없고 음악 하나면 돼.'라고 자위할 때가 있었는데.
뭐, 그 땐 그랬다.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보다는 과거를 반추하는 비율이 더 높아진 요즘은 소위 내가 그렇게 욕하고 다니던 꼰대가 되어버렸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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