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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회사원, 2014~

화요일 아침의 가을 하늘은 공활한데.

by hyperblue 2020. 10. 6.

아침 6시 20분. 이젠 듣기 싫지도, 좋지도 않은 모닝콜 소리에 눈꺼풀이 열렸다. 일순간 차디찬 한기가 느껴진다. 맞은편 벽의 보일러 스위치에 내장된 디지털 온도계는 섭씨 21도를 가리키고 있다. 쥐톨만한 숫자가 멀리서도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걸 보니 나의 라섹수술은 아직까진 대성공이다. 그나저나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 25~6도 였는데. 갑자기 드라마 Game of Thrones에서 "Winter is coming."이라고 나지막히 말하던 Jon Snow의 육성대사가 떠오른다. 현실과 드라마 세트장을 넘나드는 몽롱함이 잠시간 계속되는 가운데 머리맡에 있는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음악소리. 고막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소프트한 비트와 멜로디 라인, 반복되는 가사.

And I'm leaving you all that I can
And I'm living to all of your plans
And I'm giving you all that I can
And I'm living to all of your plans

끝없이 반복되는듯한 감미로운 목소리와 80년대 retro풍 synth 사운드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절로 씨익 미소짓게 한다. 아마도 120~130bpm 사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속도감. 음, 실제론 조금 더 빠르려나- 아무렴 어때. 몇년 전에 합정에서 디제잉(믹싱)을 배우면서 사용했던 rekordbox란 프로그램을 통해 bpm에 대한 감을 좀 익혔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즐겨듣던 trance는 140bpm을 상회하는 속도였다는 것도 이 때 되어서야 알았다.

아침에 이런 호사를 누리며 잠시나마 느긋하게 누워있을 수 있는 것은 재택근무 덕분이다. 평소 같았다면 정신없이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아무 옷이나 잡히는 걸 마구 입을 바로 그 시간에 이런 사치를 부릴 수 있다. 그리고 창문을 열어보니 말그대로 구름이 한 점도 없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새파란 가을 하늘. 아침부터 평소에 안해봤던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그래, 밖에 나가자.

츄리닝 바지, 눌러 쓴 모자, 그리고 흰색 후리스. 전신거울 앞에는 흡사 큰 백곰 한 마리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서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세수와 면도를 하고, 선크림을 얇게 펴바른 채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동네, 조용한 사람들. 적당히 시원한 아침 공기 덕분에 기분이 좋다. 공공근로 하시는 분들의 골목 담배연기와 일찌감치 문을 연 추어탕집에서 새어나오는 매콤하고 구수한 향 또한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침잠을 깨운 그 음악이 이어폰에서도 계속 반복되며 행복감을 이어간다. 어디를 한번 가볼까. 서강대를 보러가자.

내 눈에만 보이는 서강대 정문

두달 전까지만 해도 일부러 1시간 정도 집에서 나와야 볼 수 있던 바로 그 학교, 그 동네가 이젠 걸어서 5분 생활권이다. 누가 보면 서강대 졸업생이라고 생각할정도로 내 마음속엔 여러모로 각별한 곳. 아파트 숲 사이를 지나서 걷는 길에 벌써 은행이 여기저기 떨어져있다. 아무래도 오늘 신발장에선 은행냄새가 좀 나겠다 싶다.

반복되는 비트가 귀를 간지럽히고, 그리 싫지 않은 은행향이 은은하게 올라오고, 고개를 들어보니 달님이 아직 햇님과 공수교대를 못했는지 꽤 높은 곳에서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이쯤되면 못한게 아니라 안한거다. 나한테 '지금 기분 좋니?'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옆 신수동 성당의 붉은벽돌에서 느껴지는 진중함이 흥겨움을 약간 누르면서 내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이 음악의 반복되는 가사만큼 난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있는 걸까, 하고 있는 걸까. 정녕 당신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주님. 마지막으로 찾아뵌게 몇년 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만, 당신의 길 잃은 어린 양은 오늘도 아침부터 길거리를, 세상을 배회하고 있사옵니다.

가을 하늘은 이처럼 공활한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허한걸까.
내 마음은 이처럼 허한데, 가을 하늘은 왜 이렇게 공활한걸까.

화요일 이른 아침, 반복되는 가사와 비트가 새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 끝없이 울려퍼진다. 조금 우울해지려던 찰나에 동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태양의 따사로운 햇살이 "감히 우울해질 생각도 하지말라"며 근무 시작을 독촉한다.

Maybe I'm not giving you all that I can.
I'm not living to all of your plans yet.

ALPHA 9 - All That I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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