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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scellaneous/수험생, 2010~2012

후유증, 그리고 잡소리

서울 모 전경대 중대무전병

제대한지 3일째. 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왔다갔다하는데 나름 슬슬 군바리티도 벗고 민간인 스멜이 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말 그저께 제대한게 맞냐?', '제대한지 오래된 사람같다.' 등의 입에 발린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역시 '민간인 짬밥'이 미천한 것은 숨길래야 숨길 수가 없나니...그건 바로 대화를 할 때 툭툭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경찰무전음어이다.

의경의 특징 중 하나가, 늘 사용하는 경찰무전기로 인해 무전음어가 부대내의 일상적인 생활회화에도 통용된다는 것. 뭐, 취사반이나 행정반 등 무전과는 거리가 먼 보직이라면 다르지만, 방범, 교통, 시위진압 등 '필드'에서 뛰는 대원들은 무전기가 곧 총이요, 생명이다. 고로, 옛날에는 신병이 들어오면 두드려패서 수백개의 무전음어를 외우게 하는 것이 암암리에 행해졌으나, 요즘은 그렇게까지 하는 곳은 많지 않다고 들었다.

어쨌든, 맘편하게 제대를 기다리려고 하던 말년에 중대무전병을 100일이나 넘게 하다보니 무전기는 내 친구요, 가끔은 던져버리고 싶었던 애증의 대상이었다. 가끔 큰 상황에 나가면 무전기가 4개, 5개여도 부족할 때가 있었다. 게다가 상황이 급박해져서 저마다 쉴새없이 무전을 쏟아낼 때면, 나름 명색이 중대왕고인데 후임들한테 도와달라고 하소연할 수도 없고 혼자 미쳐버릴뻔 한게 한두번이 아니다. 내가 우리중대에 대해 하달된 상부의 명령무전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나를 믿고 명령을 기다리는 우리 중대 전체가 큰 상황에서 작전실패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감은 중대무전병 출신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속시원하게 'X같은' 무전조끼를 던져놓고 홀가분하게 부대 밖으로 나왔는데, 알콜성분이 조금만 체내에 들어가면 내입에선 특정 동작이나 대상을 지칭하는 무전음어가 가끔 튀어나온다. 아직 뼛속까지 가득 찬 군바리 냄새를 제거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의경을 제대하면서 얻은 것은, 경찰조직의 구성, 서울 일선 경찰서-지구대의 근무형태, 집회시위를 관리하는 경찰의 지휘체계, 무전음어 등등이다. 솔직히 제대하고나니 살면서 그리 큰 도움이 될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접하는 지역경찰들의 생리에 대해 알았다는 것은 아무 의미없이 제대하는 보통의 군생활을 생각해봤을 때 나쁘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경찰이 정말 무서워해야할 것 중 하나는, 일반 시민들도 시민들이지만 바로 전의경 전역자들이다. 우리들은 이 조직의 말단에서 2년동안 온갖 허드렛일을 다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이 조직의, 조직원들의 생리에 대해 훤한 사람들이 많다. 전역자들은 일반시민들이 경찰에 대해 갖는 잘못된 오해를 바로 잡아주는 조력자가 될 수도 있지만, 무서운 매의 눈으로 부조리를 감시, 고발할 수도 있다.

작년 4월 말 즈음, 광화문에 배치 되어 일반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통행하는 것을 발견하면 말로 살살 달래서 끄는 근무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시민들은 비협조적이었고, 우리들 또한 비협조적이면 억지로 끄진 말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는데, 한 젊은 남자에게 촛불을 끌 것을 부탁하자, 그 남자는 "내가 전경 중대무전병이었어! 너희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지휘관 데려와!"라며 우리한테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시비를 걸었다. 내가 조근조근 자초지종을 물으니 살짝 당황하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서 '정말 중대무전병 출신이 맞나?'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달래는데 애를 먹었던게 사실이다. 이처럼 전의경전역자는 때론 가장 무서운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근데 지금 내가 이 얘기를 여기다가 왜 하고 있는걸까. 나도 모르겠다. 그냥 쵸큼, 아주 조금 알딸딸한 밤이다.

본문 요약 -

1. 입에 밴 경찰무전음어 등 군바리 티를 벗고 싶은데, 잘 안된다.
2. 경찰은 전의경 전역자들을 잘 다뤄야 한다.(?)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