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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taste.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취향'을 갖고 있다. 음악, 음식, 영화, 관계, 여행, 성(性)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서 그러하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다짜고짜 본인의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자신의 취향을 A부터 Z까지 유려하게 하루종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는, 그리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하부 조직들은 일반적으로 '튀지 않는 것'을 일종의 덕목으로 여긴다. 12년 전 논산 육군훈련소에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도 항상 '중간만 해라'였으며, 나 역시 고참 반열에 들고 난 뒤에는 늘상 후임들에게 그런 류의 조언을 하며 전역했다. 어찌보면 당시에 그건 유효했다. 최소한 군대라는 조직은 특별한 목적을 갖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여러모로 특별한 집단이었으니깐. 반세기를 넘게 이어지는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사회 이곳저곳에 깊이 뿌리내린 군대문화의 잔재는 아직도 알게 모르게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를 억압한다. 가만 보면 '취향' 역시 그러하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나의 취향은 그닥 일반적이지 않았다.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음악 취향'이 그렇다. 김건모와 노이즈, 육각수 등의 대표곡들이 들어있는 컴필레이션 음반을 사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듣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어느 날- 유선방송 채널 중 하나였던 'Channel V'라는 외국 음악채널에서 그동안은 접하지 못했던 시끄럽지만 흥겨운 락음악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이거다!'라는 그 때의 경험은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특정 장르에 탐닉하도록 만들었고, 밤새도록 음악과 밴드 정보를 찾으며 희열을 느끼는 경험은 10살 정도 였던 때 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되는 나만의 행복이다.
그 때 부터 나는 줄곧 친구들 사이에서 가사도 알 수 없는 시끄러운 음악을 좋아하는 괴짜로 통했다. 모두가 '가요탑텐'을 시청하며 사랑을 소재로 한 노래들을 흥얼거릴 때, 나는 마약에 찌든 백인들이 사회불만을 풀어내는 노래를 들으며 헤드뱅잉을 했다.(물론, 그 당시에는 가사를 모르고 들었지만) 중2병이 중증으로 치닫던 시기에는 꼴랑 이 음악 하나로 '나는 역시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상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혔을 때도 잠깐 있었지만, 머리가 굵어지니 이것은 어디에 자랑스럽게 얘기할 것도,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었다. 도리어 이따금씩 있는 노래방 회식자리에서 선곡리모콘을 들고 머리를 긁적이게 만드는 조금은 안좋은 취향이었다. 어찌보면 나의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취향이 되어버렸다고 해야하나.
기타교습을 받을 때, 선생님들은 종종 이야기했다. '취향은 변하는 거다'라고. 그들이 늘상 얘기하고 기타 테크닉을 연마하는 주옥같은 락밴드의 음악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듣던, 연주하던 밴드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요즘 밴드'와 그 음악들을 무심결에 무시하는 발언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항상 덧붙였다. '나이들면 확실히 음악 취향이 변한다'고. 하지만, 나의 20년 락음악 취향은 참 한결같다. 비슷한 음악을 좋아하던 대학교 친구들은 다들 '이젠 못듣겠다'며 좀 말랑한 음악으로 움직였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감히 '뉴메탈계의 비전향장기수'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싶을 정도.
EDM도 어렸을 적부터 혼자서 즐겨왔던 애호 장르 중 하나인데, '좋아하는 음악들을 직접 믹싱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디제잉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이전 팀장님 중 한 분은 '그런거 배우고 즐긴다고 회사에서 말하거나 티내지 마라. 임원 같은 높은 분들이 알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고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언(?)하기도 하셨다. 체감상 '농담'의 비율이 훨씬 더 진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 뒷맛이 씁쓸한 농담이었다.
나의 밥줄이자 생활터전인 회사생활을 계속 '잘' 하려면 눈에 띄는 문신을 해서도 안되고, 배정남처럼 멋드러지게 콧수염을 길러서도 안되고, 노랗게 머리를 염색해도 안된다. 명문화된 규정이 아닐지언정 조직구성원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암묵지'이다. 이렇게 비판적인 뉘앙스로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회사 후배가 눈에 띄는 색깔로 염색을 했다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바로 물어볼 것이다. '취향의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나 역시 이미 잠재적 가해자가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너무 '사회 속에 만연한 개인 취향의 억압'의 관점에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함은 이게 중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묻어나는 너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알고 있니?'라고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자꾸 되묻는 것 같았다. 물론, 인문학 서적이 아니기에 특별히 교훈을 강조하거나 강요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대학교 졸업 및 취직과 동시에 상실한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는 과거에는 미지수였다면 지금은 '0'이라는 상수로 변해가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서울 부동산 가격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만의 힘으로 내집 마련하기'와 같은 목표는 일단은 고이 접어서 내 마음 속 서랍 한 켠에 보이지 않도록 넣어두었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매 아침마다 지옥같았던 출근시간이 무덤덤해졌으며, 조금 변태같지만 심지어 설레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동의 목표를 갖고 함께 일을 하고, 친교까지 덤으로 나눌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감사한 요즘이다. 평일 아침 7시, 1호선 독산역 2-2 플랫폼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쾨쾨한 냄새와 이어폰 속 음악의 청량감이 동시에 만들어내는 특유의 바이브 역시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일상의 순간이다. 이 책을 통해 조금은 애매모호했던 나의 취향, 사소했던 행복의 순간들이 보다 더 구체화되었음을 느낀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너무도 당연하지만, 작금의 내 삶의 목표는 '행복' 바로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 목표는 켜켜이 중첩되는 일상 순간들의 소산이다.
사람 좋아하는 팀장님의 1:1 저녁식사 번개제안을 선약을 이유로 용감하게 거절하는 것도-
'혼자가 편하고 좋으면서도 새로운 타인과의 소통을 갈구하며 때로는 즐기는 것도-
서른넷의 평범한 회사원인 내가 피식거리며 열거할 수 있는 나만의 참 고약한 취향이다.
난 과연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도 보청기를 끼고 20세기말의 그 락음악을 들으며 어깨춤을 추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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