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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연초부터 매스컴에 등장하여 팬더믹으로 진행되며 전세계에 맹위를 떨친지 어언 9개월차. 이제는 마스크 없는 외출은 상상하기 힘들어졌고, 맞교대 재택근무를 계속 하다보니 얼굴을 못본지 오래된 회사 동료들도 많아졌다. 이미 일상이 된 소위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미래가 궁금했기에 이 책을 꼭 한번 읽고 싶었다. 시의적절한 제목과 표지 때문인지 각 서점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큼직큼직한 글씨와 주술관계 호응이 어색하지 않은 번역 덕분에 토요일 반나절만에 술술 읽어버렸다. 하지만, 읽고 나서 마음 속을 휘감는 '속. 았. 다.'는 기분은 지금 이 순간도 떨쳐내기 힘들다. 명료한 제목과 저자에 대한 소개(블룸버그 선정 세계 1위 미래학자)에서 비롯된 기대감은 배신감으로 귀결되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이 책을 읽어야만 알 수 있는, 혹은 저자의 '미래학자'적인 면모에서 드러나는 날카로운 현실 통찰과 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뉴스 많이 보고 세상과 담 쌓고 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응, 맞아맞아. 그렇지"라고 수긍할만한 내용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게 나의 짧은 서평이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의 내용이 많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재택근무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언젠가 코로나 사태가 종료되더라도 조금씩 더 일반화될 것이다."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누가 있나. 이걸 미래학자의 통찰력 있는 미래 예측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읽어야만 하나.
저자는 코로나19가 영향을 미친 작금의 상황을 나름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의견을 정리했다. 일자리/교육/에너지/금융/통화정책/재정정책/농업/공급망/... 딱 봐도 뭔가 너무 많다. 그닥 두껍지 않은 책에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나열했을 때에 알아봤어야 했으나 나의 독서내공이 일천하여 예지력이 낮은 탓에 아쉬운 마음을 키워가면서 끝까지 읽었다.
초반에 고개를 갸우뚱하기 시작했던 내용 중 하나는 '재택근무가 에너지 절약에 일조할 것'이라는 저자의 논리전개 부분이었다.
<저자의 주장> <근거> |
그냥 끄덕끄덕거리면서 지나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잉..?' 했다. 재택근무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히터/에어컨 안켜고 근무하나. 도리어 한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냉난방을 할 수 있는 데, 개별적으로 냉난방을 한다면 개별 수요의 합에서 도출되는 에너지 총 사용량은 더 증가할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저자의 논지 큰 틀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이 부분은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다. 도식화된 근거자료로 논지를 강화해주었으면 괜찮을텐데, 이 책엔 그런 것이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책 중간중간에 도표 등이 큼직하게 삽입되어 있긴 했으나 이 도표들은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자료들이었다. 예를 들면, 한 도표는 '출퇴근 방식의 변화'를 언급할 때 '재택근무' 막대가 높이 솟아있는 것을 보여주며 아까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p.55)
가장 황당했던 대목은 '15장 리더십의 미래'였다. 심지어 이 챕터는 단 2페이지로 정리되어 있다. 내용인 즉슨, 앞으로 다가오는 변화로 인해 리더쉽을 발휘하는 것은 업무에서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며, 더 분산된 기업의 조직 사다리에서 승진하려면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것. 이게 코로나 시대를 통해 우리가 깨달은, 견지해야 할 핵심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코로나 이전에는 아니었나. 코로나가 터지기 전에는 리더십이 필수적이지 않았다가 이번에 필수적으로 변한 것인가. 마치 왕년에 내가 하던 자소서 분량 부풀리기를 책에서 보는 느낌이었다.
코로나19로 도입되기 시작한 재택근무가 더욱더 일반화 될 것이고, 대중이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경험하였으니 의료산업이 유망할 것이고- 이런 식의 내용이 내내 반복되었기에 말미에는 화가 났다. '음, 뒷쪽에 뭔가 있겠지.'란 기대는 산산조각났다.
저자의 전문분야에서의 내공을 감히 내가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표지에서 저자를 치켜세워주는 광고문구들이 낯뜨거울 정도로 부실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번역서이기에 혹시 지나친 의역으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제목 사기'가 아닌가 싶어서 원서 제목을 찾아보니 "The Future After COVID"-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직역 제목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독서 내공이 일천하여 책의 심오한 어떤 면면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가 싶어서 미국 아마존의 리뷰를 몇 개 찾아보니 내가 헛짚은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샘플로 하나를 제시하자면 아래와 같다.
내 생각과 너무나 똑같아서 피식했다. 정말 'Not what I was looking for'이다.
번역에도 아쉬운 점이 꽤 많았다. 술술 읽히는 텍스트에서 역자가 번역에 공을 기울인 것은 느껴졌으나 옥에 티가 눈에 많이 띄었다. 몇 가지 열거하자면 아래와 같다.
1. (p.94) 확장급여형(defined benefit) 연금 ☞ 확정급여형 2. (p.113)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 MSMCA ☞ USMCA 3. (p.115) Erst kommst d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 ☞ Erst kommt das Fressen, dann kommt die Moral. 4. (p.121) 포스트 투르스 시대의 탄생 ☞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탄생 5. (p.167) 활동가 투자자 (activist investor) vs. 행동주의 투자자 |
이것 외에도 경제/금융 쪽 챕터에서 번역이 아쉬운 부분이 더러 있었다. 단어 선택에서 역자가 상경계열 전공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하고 넘기긴 했으나 아무래도 내용 자체가 잘 와닿지 않았다. 근데 이 부분은 역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저자의 부실한 저술 그 자체가 원흉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다보니 혼자 분에 차서 비판과 비난을 오가는 서평을 하며 마무리하게 되었다. 누가 보면 저자에게 앙심이라도 품은 줄 알겠다. 엊그제 미국의 수소전기차 기업 니콜라(Nikola)에 대해 '얘네 그냥 10사기임ㅇㅇ'라며 거하게 매도 리포트로 까내려간 힌덴버그 리서치(Hindenburg Research)의 담당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뜬금없이 주식 리포트 이야기도 나왔고, 저자도 자기 스스로를 "the most accurate financial market futurist and economic forecaster in the world"라고 개인 사이트에 소개했으니 그에 걸맞게 짧게 마무리 한다.
이 책에 대한 저의 의견은 "STRONG SELL"입니다. FX나 주식이었으면 영끌해서 숏(short)치시길. 졸저입니다. DO NOT BUY. 나무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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