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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著>)

by hyperblue 2021. 6. 14.

 

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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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내내 카페에서 쭈욱 읽어내려간 책장을 덮으며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다. 지적능력과 인간의 감정,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 없는 고찰이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차분하게 식혀주는 밤공기처럼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주인공 찰리는 지적장애가 있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다소 비윤리적인 프로세스를 거쳐 지적능력을 되살려주는 모험적인 뇌 시술을 받는다. 이 시술은 실험용 쥐인 앨저넌에게서 효과가 입증되었다는 이유로 인간에게는 처음 행해진 것. 하지만, 이 시술은 찰리를 단순히 일반인 수준으로 지적능력을 복원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대학교수를 비롯한 여타 일반인들은 범접할 수 없는 수준으로 지적능력을 올려주고, 그는 차츰 '바보' 찰리로서 살아가던 일상에서 벗어난다. 선악과를 한 입 베어문 것처럼, 우물 안에서 막 나온 개구리처럼 그는 30년 넘게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마주한다. '모르는게 약'이었던 시절에서 벗어나 굳이 몰라도 좋을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고, 주위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재정립된다.

시술을 통해 천재수준의 지적능력을 갖게 된 찰리는 도리어 본인이 주도하게 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시술선배인 생쥐 앨저넌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신도 앨저넌과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주식시장에서 급등이 나오면 급락이 뒤따르듯, 갭상승을 하면 갭을 메꾸러 하락하듯- 그렇게 인위적으로 지나치게 향상된 지적수준이 머지 않은 시일내에 다시 지적장애를 앓던 이전의 찰리 시절로 되돌아간다는 설정.

똑똑해진 찰리는 늘 과거의 찰리와 늘 싸웠다. 자신의 장애 때문에 사실상 아동학대를 일삼았던 어머니, 장애가 있는 오빠를 증오했던 철없는 여동생, 자신의 장애를 감당하기에는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까지 함께 만들어 낸 끔찍한 트라우마. 이런 기억들이 만들어낸 어린시절의 찰리는 뛰어난 지적수준으로 갑자기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현재의 찰리를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괴롭혔다. 지적장애가 있던 시절 자신의 담당교사였던 키이넌 선생이 시술 후에 연인 '앨리스'로서 찰리의 삶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늘 예전 찰리의 잔영과 싸워야만 했다. 사랑의 감정을 키워가는 것을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처음에는 갑자기 작중에 등장한 러브라인이 다소 뜬금없다고 느꼈으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앨리스/페이와의 각각의 관계 설정은 꽤 몰입감 있었다. 머리가 굵어진 찰리는 비로소 이성과의 사랑이란 감정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한 두 여인을 통해 일종의 자기 객관화 과정을 거친다. '혼자인데 외롭지 않고, 평생 혼자 살아도 돼'라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주변인들의 말을 내가 믿지 않는 이유이다. 억지로 둘이 함께 하는 것도 안될 일이지만,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큰 틀의 집단생활을 하며 가족/연인과의 친밀한 관계 구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일부 찾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친밀한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찰리가 앨리스 및 페이와의 관계 설정시에 두 사람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찰리 속에 억압된 자아를 밖으로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부분과 그에 대한 찰리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예전의 바보 찰리도 현재의 천재 찰리와 똑같은 인격체였다'고 강변하며 자신에 대한 주변의 시선, 프레이밍과 끊임없이 싸우던 찰리는 다시 예전과 같은 지적장애 상태로 급속히 돌아갈 것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깨닫고 난 후, 시한부 환자가 삶을 정리하듯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 결과물을 기록한다.

무엇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일까. 모르는 때가 차라리 더 행복했던 찰리에게 시술을 통해 세상의 이면을 모두 알게 하여 고통스럽게 만든 의료진의 시술은 결과적으로 지탄받아야만 하는 것일까. 책장을 덮고도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이따금씩 하는 소개팅 혹은 비즈니스 만남에서는 내가 다니는 회사, 내가 졸업한 학교가 나의 이미지를 브랜딩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얄팍한 껍데기들로는 정의될 수 없는 저마다의 개성이 뚜렷하고 고귀한 존재이다. 그럼 이런 껍데기가 아닌 무엇이 우리 모두를 가장 인간답게, 나답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글, 그림, 음악 등. 인간의 감정을 녹여낸 것이 작품 그 자체이기도 하고, 반대로 작품들이 향유하는 이의 감정을 녹여내기도 한다. 비슷할 수는 있지만 같을 수 없기도 하다.

굳이 우선순위를 매기자면 나는 나의 '인간다움'을 느끼기 위한 것으로 이미 오래전에 음악과 글을 택했다. 비트와 다양한 코드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힘을 믿으며, 때론 칼보다 무섭고 때론 모닥불보다 따뜻한 글의 힘을 믿는다. 유력 정치인이나 기업가가 되어 이름을 남기고 싶지는 않으나 광활한 인터넷 어딘가에 내가 쓴 글, 내가 언젠가 만들 음악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길 소망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소통 및 관계 구축을 통해 인간다움을, 잠시 거쳐가는 세상에서의 존재 의미를 느낄 수 있길 소망한다. 언젠가는 페이보다는 앨리스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길 소망한다.

지적능력이 나날이 감퇴하며 사실상 죽음과 같은 터널 안으로 진입하던 와중에도 자신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생쥐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대신 놓아달라던 찰리의 애절한 부탁에 눈시울이 빨개진다. 나 역시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해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해준 주인공 찰리 고든의 무덤 위에 꽃 한 송이를 놓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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